낙태죄 폐지되던 날-재판 방청기

[방청기] 낙태죄 위헌 선고날을 역사에 아로새기며

지혜(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활동가)

2019년 4월 11일 하루 전에 헌법재판소 선고방청이 확정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교과서나 신문에서 들어본 곳, 내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헌법재판소가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이면 방청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신청을 했다. 낙태죄 위헌 선고가 밝혀질 역사적인 날인만큼 나 이외에도 신청한 인원이 많을테니 추첨이 될 거란 기대를 안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확정 문자를 받고는 기뻤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헌법재판소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2004년 그 무렵 텔레비전에서 싸우는 여성들을 보았다. 뉴스보다는 개그프로그램이 더 좋았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김미화로 불리던, 여성 연예인이 선두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그 당시 호주제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어렸다는 변명으로 그 장면은 이내 내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호주제 헌법불합치 선고가 있던 날 브라운관을 통해 그가 매우 기쁨에 차 우는 모습을 보았다. 무엇이 예능 연예인에서 개그무대를 박차고 나오게 한 것일까, 그는, 여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 것일까, 그리고 그 날이 한국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날이었는지는 그로부터 한참 후가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초등학생 지혜에서 반성매매 여성주의 활동가 지혜가 되어서야 나는 헌법재판소 앞에 서서 낙태죄 폐지 시위를 하고, 헌법재판소 선고방청을 하게 되었다. 헌법재판소 앞에 서서 릴레이 기자회견에 참여하면서, 약 1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교차해서 보았다. 낙태죄 폐지를 눈앞에 둔 역사적인 날을 되새길수록 손가락 끝부터 감각이 새롭게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내가 서있는 이 자리는 내가 기억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여성주의자들이 다져온 곳이며, 역사의 흐름에 내가 있다.

1시가 넘었을 무렵 헌법재판소의 심판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심판장 내부를 촬영하려는 언론사들이 먼저 입장하였고, 그 뒤로 시민방청이 줄을 섰다. 헌법재판소 심판정은 일반 법정보다 더 큰 규모에 장식도 화려했다. 그 위용은 헌법재판소가 다루는 사건이 매우 특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낙태죄 위헌 여부를 다루기 이전에 15개의 사건들을 들으면서 점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낙태죄 사건이 차례가 되었을 때 헌법재판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문, 모두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함”

심판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모두가 이 소식을 주변에 알리고 싶어하는 눈빛으로 헌법재판관의 선고 이유에 집중하였다. 나 또한 급하게 이유를 받아적고 단체 사람들과 지인들에게 판결을 알리며 축하했다.

반성매매 운동에서 낙태죄 폐지는 성매매 피해여성이 겪는 문제를 한 꺼풀 벗겨낸다. 성매매 피해여성은 낙태죄에 의해 임신중지를 할 수 없다. 사회는 성매매 피해여성을 ‘동등한 거래주체’로 간주하며,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위험을 ‘마땅히 감수해야할 것’으로 방조하고 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선고는 성매매 피해여성들이 자기 몸의 결정권을 획득하는 성취의 경험을 안긴다.

심판장 밖을 나오니 헌법재판소 앞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낙태죄 폐지를 염원하는 구호를 외치고, 서로를 독려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응원의 말들을 나누었다. 한 친구는 내게 이런 역사적인 날을 경험하고 기억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그리고 여성주의 활동가 친구를 곁에 두어서 기쁘고 고맙다는 말을 해줬다. 그 말을 듣고 코끝이 울렸다. 나는 아직 신입활동가의 티를 벗지 못했지만, 이런 순간을 활동가로서 맞이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앞서 여성주의의 길을 간 선배들에게 고맙다. 낙태죄는 헌법불합치, 사실상 위헌 선고를 받았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 여성건강권과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성취할 수 있도록 임신중지를 합법화하고, 성매매 여성을 비범죄화 하라! “우리는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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