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지 말라’

 

<임신출산결정권을위한네트워크> 임신중지(낙태)권 요구안
: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지 말라’

임신중지(낙태) 등도 재생산권리이다.

한국 사회는 임신중지(낙태)가 법률상 허용되는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형법상 낙태죄로 금지되어 있으며, 임신중지(낙태)를 선택한 여성을 처벌하도록 되어있다. 이렇듯 임신중지(낙태)를 범죄시함으로써 여성들이 낙태 경험을 침묵하게 하고 공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여성의 입장과 경험이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드러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성이 경험하는 성관계, 피임, 임신, 임신중지(낙태), 출산, 양육 등의 경험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으며, 여성의 삶의 경험 속에서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따라서 여성에게 있어서의 재생산권은 여성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재생산과 관련된 모든 상황에 대한 권리. 즉 성관계, 피임, 임신, 임신중지(낙태), 출산 등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며, 재생산의 제반 사항에 대한 결정권과 통제권을 포함하는 권리이여야 한다.

여성의 몸과 성은 국가 정책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까지 국가는 여성의 임신중지(낙태) 및 출산을 재생산권 측면에서가 아니라 국가 인구정책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며 ‘낙태죄 도입’ 및 ‘강력한 가족계획 정책’을 추진했다. 여성을 자기 삶을 계획할 권리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은 채, 한때는 출산율을 낮춘다는 명목으로 지금은 출산율을 높이는 해결수단으로 ‘생명존중’을 내세워 여성의 몸과 성을 통제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저출산 담론 속에서 여성은 ‘불법낙태 단속’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출산을 강요받고, ‘일·가정 양립’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시장에서의 차별과 비정규직화를 강요받고 있다.  실제 여성이 임신중지(낙태)를 스스로 선택 할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낙태에 대해 처벌규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에서의 법적 처벌 여부와 무관하게 국가가 임신한 여성 모두에게 출산을 강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신한 여성을 규제하는 것을 넘어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를 통하여 여성에게 성적 행위규범을 강제적으로 부과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에게는 여성의 경험과 입장을 고려하는 재생산 정책이 필요하다.

모든 여성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을 통한 여성 고유의 경험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 고유의 경험은 성적 차이에 근거한 권리로 존중되지 않고, 임신, 출산, 양육,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겨져 여성의 가장 큰 임무는 가족 관계 내에서의 출산으로 규정되고, 성적 권리 없이 성관계의 결과(임신, 낙태, 출산)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또한 이성애중심의 결혼을 전제한 성별분업체계 속에서 출산과 동시에 육아와 양육은 여성만의 몫으로 전가되어 왔으며, 출산과 양육으로 인한 각종 사회 경제적 부담과 차별은 온전히 여성만의 몫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신중지(낙태)에 대한 제한은 여성의 몸에 대한 규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규제다. 여성의 임신중지(낙태)라는 선택은 성별분업 체계 속에서 강요된 모성과 양육에 대한 부담을 미루거나 거부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여성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여성의 눈으로 성관계, 피임, 임신, 임신중지(낙태), 출산 등 여성의 몸과 재생산활동의 경험을 말하려 한다. 임신, 출산과 더불어 임신중지(낙태) 역시 여성 스스로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 또한 여성이다. 따라서 관련법과 제도는 당연히 여성이 중심에 있어야 하고, 여성의 경험과 입장이 고려되어야 한다. 모성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더라도 여성의 모든 재생산활동이 여성의 권리로서 온전히 보장되어야 하며, 임신, 출산, 의료, 복지, 여성의 노동 등과 관련된 재생산 정책 수립에 있어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여성의 삶의 경험을 고려한 ‘재생산권’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출산정책, 양육정책, 여성노동정책 등을 연결하는 통합적 재생산정책이 필요하다.

이제 한국사회는 임신중지(낙태)를 종용하는 현실을 직시하라

왜 여성이 임신중지(낙태)를 선택하는가? 아니 무엇이 여성이 임신중지(낙태)를 하도록 만드는가? 한국사회에 낙태가 만연하는 것은 생명존중사상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임신을 할 수 있는 여성의 몸, 성, 자기결정에 대한 존중과 출산과 양육을 선택할 사회적 구조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임신중지(낙태) 결정의 우선권이 여성에게 주어져 있지 않고, 여․남간 불평등한 성관계와 피임, 성적 권리보다 윤리교육에 그치는 성교육, 성폭력과 원치 않는 임신, 비혼모·부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경제적 어려움,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여성의 저임금과 비정규직화, 양육비용의 증가, 자본에 이윤을 보장해줄 수 있는 생산성 있는 인구만을 바람직한 인구로 간주하고 있는 국가 정책 등. 이 모든 것이 낙태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의 성적 권리와 여성의 노동권이 온전히 보장되지 않는 사회, 성역할 분담이 고착화된 한국사회의 현실이 여성으로 하여금 출산을 포기하고 임신중지(낙태)를 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아래와 같이 임신중지(낙태)와 관련한 우리의 요구를 제기하며, 이를 위해 투쟁해 나갈 것이다.

 
1. 임신중지(낙태)를 선택한 여성들을 처벌하지 말라! / 임신중지(낙태)한 여성은 죄인이 아니다!

2009년 말부터 한국 사회는 임신중지(낙태)한 여성과 담당 의사들에 대한 고소․처벌을 가속화하고 있다. 하지만 고소나 처벌을 통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여성들은 성과 관련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여러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피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 최종적인 상황에서 원치 않았던 임신을 종결시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으로 임신중지(낙태)를 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고소나 처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접근은 그 자체로 매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임신중지(낙태)는 성관계, 임신, 출산, 양육 등에 이르는 삶의 재생산과 연관된 과정에서 여성 스스로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판단하여 행위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재생산 권리’의 하나이다.

국제사회에서도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에 근거해 임신중지(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낙태죄 폐지를 각국에 권고하고 있다. <여성의 임신․출산 및 자기 결정권 네트워크, 이하 네트워크>도 임신중지(낙태)를 여성의 재생산 권리로 인식할 것을 주장하며, 임신중지(낙태)한 여성들의 처벌에 반대한다.

2. 본인 요청에 의한 임신중지(낙태)를 허용하라.

<네트워크>는 여성의 의사에 근거한 임신중지(낙태)를 허용할 것을 요구한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국 중 임신중지(낙태)를 합법화한 국가는 23개국에 달하며 대다수 국가가 임신 후 12주에서-24주까지 혹은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존할 수 있는 시기 전까지’ 등의 조건을 두어 여성 스스로의 의사에 근거한 임신중지(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이에 <네트워크>는 본인 요청에 의한 경우, 의학적으로 여성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간주되는 시기까지의 임신중지(낙태) 시술을 전면 허용할 것을 요구한다. 그 어떤 경우라도 여성이 처할 여러 조건과 의학적 상황들을 고려하여 당사자 여성의 의사를 우선적으로 존중하여 결정할 것을 촉구한다.

3. 여성을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인정하라

모든 여성이 임신, 출산, 임신중지(낙태), 양육에 이르는 재생산 관련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관련 경험이 여성에게만 해당된다는 측면에서, 재생산 권리는 여성만의 특수한 권리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여성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성관계, 임신, 임신중지(낙태), 출산 등의 문제에 대해 여성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주체로 인정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임신 중지(낙태)는 성적 불평등과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이 존재하는 현 상황에서 여성이 전체 삶의 설계 속에서 자신의 신체에 대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일이다. 하지만 현재 논의되고 있는 임신중지(낙태) 상담 의무화 정책, 숙려 기간 도입 제도 등은 관련 정보를 제공하거나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미명 하에 오히려 임신중지(낙태)를 선택하는 여성의 자율적 판단과 결정을 무력화시키고, 임신중지(낙태) 시술을 지연시켜 후기 낙태로 이어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당사자간의 자율적 의사 소통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임신중지(낙태)에 대한 결정을 배우자 동의로 법적 강제하는 것은 배우자의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범죄화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따라서 <네트워크>는 현재 논의되는 낙태 상담 의무화 정책이나 숙려기간 도입 및 배우자/보호자 동의를 임신중지(낙태) 시술의 법적인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4. 안전하게 임신중지(낙태)할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하라

임신중지(낙태) 불법화로 낙태 시술 병원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어 시술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음성적 임신중지(낙태) 수술이 증가하고 있다. 기사 보도에 따르면 시술 비용은 이미 몇백만원을 넘어 비용부담이 너무 커져 버렸고, 브로커를 통해 해외 임신중지(낙태) 원정까지 벌어지는 상황이 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사례에 비춰볼 때, 이런 분위기라면 최소한의 의료적 안전 조치조차 없는 상황에서 불법 낙태 시술소를 통한 음성적 임신중지(낙태)가 행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현실은 최근 국제사회에서 강조되는 안전한 임신중지(낙태)의 조건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맥락에서 매우 우려되는 바이며, 그 피해 역시 고스란히 여성의 몸에 돌아간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임신중지(낙태) 불법화가 강화될수록 임신중지(낙태)로 인한 여성의 건강권 침해는 높아진다. 특히 부담비용 증가로 인해 빈곤 계층 여성들이 불법 시술과 같은 음성적 임신중지(낙태)에 노출될 확률은 더욱 높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더 많은 여성들이 위험한 임신중지(낙태) 시술로 내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임신중지(낙태)는 여성 건강권의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여성이 안전하게 임신중지(낙태) 받을 수 있는 권리 보장을 위한 사회적 제도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하나의 대안이 바로 임신중지(낙태) 시술을 일반 의료 행위로 인정하여 의료 보험을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임신중지(낙태) 접근권에 대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영국, 독일, 덴마크 등지에서는 임신중지(낙태)에 대한 무료 시술을 보장하고 있고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는 의료보험 적용을 하고 있다.

 5. 피임 등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적 정보 접근권을 강화하고 응급 피임약을 보편적으로 시판하라.

여성이 스스로 임신과 출산의 문제를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으려면 다양한 피임법에 대한 교육과 관련 정보나 피임에 대한 접근권이 강화되어야 한다. 학교 교육 등에서 피임에 관한 교육들을 강화하고, 이후에도 여성들이 피임, 임신중지(낙태) 등 재생산 관련 의료 정보들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의학적 정보에 대한 여성들의 접근권이 강화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의사에게도 환자에게 관련 의학적 정보를 고지할 의무가 부여되고, 그에 따라 여성들이 관련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원치 않는 성관계, 준비되지 않은 성관계 이후 여성이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응급 피임약 제도의 보편화가 필요하다. 현재는 응급 피임약을 복용하기 위해 반드시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하다. 하지만 최대 72시간 이전에 복용해야 하는 응급 피임약의 특성상 의사의 처방전을 받고 복용하기까지의 시간경과로 인해 현실적 적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네트워크>는 응급 피임약을 피임의 중요한 수단으로 바라보고, 응급 피임약에 대한 정보 제공과 구매의 보편화를 제안한다.

 

6.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라.

WHO(2007)에 의하면 현재에도 위험한 임신중지(낙태)로 매일 182명이 사망하며 위험한 임신중지(낙태)로 죽는 여성의 46%가 24세 미만이다. 또한 모성사망의 20%가 임신중지(낙태)사망 때문이다. 임신중지(낙태)로 인한 사망은 예방가능 한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건 정책의 수립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또한 사회경제적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안전한 재생산에 접근하기 어려운 여성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사회적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 처해있다. 빈곤한 여성일수록 피임을 파트너와 협상하기 어렵고, 적절한 의료서비스에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 이는 임신을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마찬가지이다. 임신 중지(낙태)의 문제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유와 권리의 문제이자 또한 한 여성이 한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하고 평등한 시민으로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조건으로서의 평등권 문제이기도 하다. <네트워크>는 성관계, 임신, 임신 중지, 출산, 양육 등의 재생산 전 과정에서 직면하는 여성의 성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평등한 사회 경제적 조건을 개선할 것을 촉구한다.

 

2010년 8월 31일

 

<임신출산결정권을위한네트워크(다함께,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성소수자위원회,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 사회진보연대, 여성주의의료생협(준), 전국여성연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GA), 진보신당 여성위원회/성정치위원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장애여성 공감, 붉은 몫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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